역사 이야기

경주 분황사를 찾아서

왕자별 2012. 11. 11. 21:13

경주분황사를 찾아서  

 

분황사(芬皇寺)는

 향내날 분, 임금황, 절사를

 쓰고 있으며 분황사 연꽃(분다리),

 부처님(각 황)이란 세상의 괴로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분다리와 같은 부처님의 도량이란

  뜻으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때 불에 타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분황사(芬皇寺) 

 

칠처가람이란?

흥윤사(경주공고자리) 영흥사(경주시 탑동 수원지 동편) 황용사,

영묘사(오릉교북쪽 흥윤사터) 사천왕사(낭산남쪽 배반) 담엄사

(오릉주차장 자리) 분황사는 칠처가람중의 하나로 법등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는 사찰입니다  

 

  

 분황사를 창건하게 된 까닭은?

진평왕이 54년간 즉위하였으나 왕자가 없이세상을 뜨자 덕만공주가

27대 선덕여왕이 첫 여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나라에서는 여왕이라고 얕보고 번갈아 가며

침략을 계속해 오게 됩니다

 

  

 선덕여왕은 부처님의 위력으로 나라를 지키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려고

절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는 3금당이 모두 탑을 향하고 있는데

 분황사는 1탑 3금당에 품자형 가람배치라는

 신라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게 됩니다

 

     

 모전석탑이란?  

분황사는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모전석탑을 중앙금당 앞에 두고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특색입니다   

 

  

탑은 탑파 또는 스투파라고도 하며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만들어진 것으로

 옛날에는 불상보다 탑을 더 숭배

하였다고 합니다

 

  

탑은 목탑, 전탑, 석탑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

으로 다듬어서 쌓은탑입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안산암으로 동해안에

있는 대본 대왕암,의견대 부근의

돌을 정성드려 옮겨와서

쌓은 탑이라고 합니다

 

 

 

 이 모전석탑은 처음에는 9층이었다고합니다만

지금은 3층만 남아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탑으로

높이가 9.3m의 모전석탑입니다

 

 

 

분화사 창건당시에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때

 반파된 것을 조선시대 때 이 절의 스님이

수리할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욱 파손시켜

1915년에 다시 수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남쪽에 쌓여있는 탑재들의

 량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산암으로 만든 벽돌 모양의 탑대들을 쌓아둔

 모습입니다 이 많은 탑재들을 모전석탑위에

올린다면 7층이나 9층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추정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탑으로

 

 이러한 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하며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진 9층탑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윗쪽이 아랫쪽 보다 약간 좁습니다

 

 그리고 1층의 네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이 인왕상은 반라(半裸)이며 옷 무늬가

 모두 다르고 불법을 수호하는 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전석탑에서 탑의 1층 네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라고 합니다

 

 

 

불탑은 대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

지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탑의

정상에 앙화만 얹혀 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감실 안에 불상을 안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남쪽에 있는 석조여래상은

탑 건립 당시의 것이 아니고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분화사 석탑에는 기단의 네 모퉁이에 돌사자가

놓여 있는데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불교에서는 사자를 성스러운 동물로 생각하여

불전이나  불탑,불상을 수호하고

장엄하는 역할을 합니다 

 

 

  

 석탑의 기단에 놓여 있는 동쪽의 두 마리는

물개의 형상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서쪽의 사자는 앞발을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이 사자상은 호탑의 의미로 네마리가 안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사자상은

앞다리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기단부는 자연석으로 쌓고 그 위에 긴 돌의

 아랫부분을 다듬어 고르게 맞추어 놓았는데

 

 이렇한 공사 방법을 그랭이 공법이라고

합니다 한 변이 약 1.3m 높이는

1.06m의 크기가 다른 막돌입니다

 

 

 

화쟁국사비는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으나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만 절 근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비신이 없어지고 비대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비 대좌 뒷쪽에 차화쟁국사

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석정(石井)은 삼용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변어정(護國變魚井)이라고도 하는데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으로깨달음에 이른는

 8가지 바른길인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는 원형은 원불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하며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보면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술법을 써서 신라의 호국용 3마리를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 가는 것을

 

호국용의 아내 3명이 원성왕에게 알리자 원성왕은

 즉시 뒤쫓아가 하양관에서 되찾아 와 동지

청지(동천사의 샘)와 분황사 우물에

다시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원효대사는 경산 압량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서

 품속으로 들어 오는 태몽을 꾸고 

아기를 가졌다고 하며

 

길을 가다가 밤나무 밑에서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두고

 누워있었다고 하는데 이 나무 이름을

사라수(옷이 날리는 모양)라고

하였답니다

 

 

 

 보광전은 분황사 창건당시의 중금당이고 경덕왕 때

 약사여래상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나 금당

 자리의 서쪽에 칭쳐 서향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주심포맛배지붕의

작은규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