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셀.
이 독일 도시 이름은 그리 유명하진 않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셀 도쿠멘타'가 열리는 곳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세계 최고의 국제 미술전, 5년 마다 열리는 거대한 미술 행사로 유명하다.
그럼 그 외엔?
카셀은 유명한 것이 없다. 5년 마다 한 번 카셀 도쿠멘타가 열리는 때를 빼면
우리가 일상에서 이런 이름을 만날 일은 거의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자료를 찾아본다면 카셀이 `메르헨 가도의 중심 도시'라는 구절을 만날 수는 있다.
독일에 다녀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독일에는
여러 도시들이 이어져 코스가 되는 `~가도'라는 이름의 여행 루트가 있다.
대표적인게 `로맨틱 가도'. 아름다운 중세의 고성 도시들이 연결된 길이다.
그 다음 유명한 길이 `메르헨 가도'다. 메르헨 가도는 `동화 가도'란 뜻.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 동화 가 그림 형제의 `그림 동화'와 연관된
도시가 이어지는 길이다. 그림 형제가 태어난 하나우에서
`브레멘 음악대'로 유명한 브레멘까지 이어지는 이 길의 중심에 카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메르헨 가도 도시들이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반면
카셀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가장 여러 도시를 가 본 나라가 독일이지만,
카셀처럼 도시 풍경이 별 볼 것이 없는 도시는 처음 봤다.
하지만 이 카셀이 아무리 `못생긴 도시'라고 할 지라도
뭔가 숨겨놓은 비장의 카드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
그게 바로 아름다운 가로수길이다.
카셀의 명물 가로수길처럼 긴 가로수길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하염없이 걷기만 해도 좋고, 그래서 영원히 길이 계속되길 바라고 싶은 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게 아니라 걷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그 가로수길은 카셀의 옛 왕궁이었다가 이젠 시민 공원으로 바뀐 카를자우에 공원에 있다.
그리고 공원의 시작은 저 넓은 잔디밭을 바라보는 딱 봐도 궁전풍인 이 건물에서 시작한다.
이 건물 앞으로 거대한 공원이 펼쳐진다. 하늘에서 보면 이렇다.
위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의 잔디밭이 펼쳐진다. 가로수길은....안 보인다?
정말 안 보인다. 그러니, 먼저 그림을 보자.
위에서 보면 어떤 공원인지 알 수 있다.
저 궁전스러운 건물이 우아하게 전면을 굽어보고, 그 앞에 인공적으로 꾸민
광대한 정원이 펼쳐진다. 정 중앙 축을 따라 궁전-십자 모양 잔디밭-그리고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그 직선축은 다시 두개의 인공 호수로 이어진다.
그리고 중앙 가로수길 양 옆으로는 인공 수로가 알맞게 부채꼴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같이 펼쳐진다.
이렇게 자연에 자를 대고 줄을 긋듯 인공적 모양을 내는 조경이
`바로크 조경'이다. 유럽의 왕과 영주들이 즐겨했던 조경 방식인데,
한마디로 `폼을 잡을대로 잡는' 조경이다. 중앙축으로 이어지는 길고
거대한 정원은 주인의 힘을 상징하는 무대 장치와도 같다.
`나, 이런 정원 있는 사람이야'란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조경이다.
좌우지간 중요한 것은 가로수길, 이제 떠나가보자.
저 계란 노른자빛 건물에서 앞을 보면 그야말로 속이 다 시원해진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니까.
사진으로는 실감이 안나겠지만 지금까지 본 잔디밭 중에서 가장 넓었다.
축구장 몇 개, 아니 여남은 개를 만들고도 남을 듯했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 저 잔디밭을 가로지른다.
넓다. 넓어도 더럽게 넓다.
나 잡아 봐라 하고 달려가는 연인이 만약 달리기를 너무 한다면
평생 잡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저 중간에 뭔가 동그랗게 풀이 솟은
무엇이 있다. 우리나라 왕릉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뭘까? 그 곳으로 간다.
가다보니 옆에도 뭔가가 있다. 잔디밭 중간에 뜬금없이 인공 물 웅덩이가 나온다.
작아서 수영하기도 불가능, 뭘 심어놓은 것도 아니고...그런데
물이 저혼자 출렁거린다.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게.
이 출렁거리는 물 웅덩이는 작품이다.
지금 열리고 있는 제 13회 카셀 도쿠멘타에 나온.
카셀 도쿠멘타는 워낙 큰 전시여서 중앙 미술관과 박물관뿐만 아니라
카셀 시내 곳곳에서 열린다. 그 중에서 이 공원에도 많은 작품들을 전시했다.
공원이 하도 크다보니 구석구석에 작품들이 숨어 있어 지도를 보면서
찾아다니면 이 공원에서만 거의 하루가 다 지나갈 정도.
넓다. 좀 걸었는데도 아직 저 봉분처럼 동그란 풀더미가 멀리 있다.
드디어 풀더미 도착. 이 것 역시 전시중인 작품이다.
너무 커서 설치미술이 아니라 거의 대지예술 수준.
저 작은 산 뒤로 드디어 가로수길이 나온다.
얼마나 왔나 뒤를 돌아다본다.
노른자빛 건물이 벌써 저만치... 이제 가로수길로. 드디어 입구가 보인다.
빽빽한 나무 숲이 중간에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가르마처럼 숲을 가른다.
입구에 들어서면 감탄이 절로 튀어 나온다.
사진이 현실을 속인다. 실제로 보면 정말 끝이 안보일 정도다.
소실점까지 이어지는 가로수길, 그 광경은 굉장했다.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양 옆에 나무들이 줄지어 서고,
그 사이로 또 길게 뻩은 길이 있다.
중심길과 양쪽 옆길까지 가로수길 3위 일체 세트같다.
가운데 큰 길과는 또 다른 느낌.
저 끝없이 이어질 듯한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이런 작은 집들이 나타난다. 카셀 도쿠멘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들.
중심의 일직선 가로수길 말고도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숲길들이 계속 나타난다.
정말 날잡아 하루 종일 걷고 싶어지지만, 볼 전시가 잔뜩이니 아쉽지만 통과.
조금 더 가니 또 작품 전시용 정자형 건물.
거미줄과 거적데기(?) 같은 다양한 물건이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미술품을 바라보면서 편하게 쉬다가 간다.
잠시 옆으로 빠져 이런 길들을 감상하며 걸어가니
이번엔 너무 화끈한 색깔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도 당연히 작품 전시장. 내부는 이렇다.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전시 이야기는 통과. 다시 가로수길로 끝을 향해 간다.
얼마나 왔나 뒤를 보니, 어느새.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힘은 들지 않는다. 잔디밭, 커다란 나무 만으로
가장 간단하게 꾸민 공원을 감상할 수 있어 지겹기는커녕
도착지가 천천히 다가오길 바라게 된다.
마침 직전 내린 비로 초록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이파리는 촉촉해졌다.
드디어 끝에 도착. 정확히는 끝이 아니다. 저 가로수길의 끝일뿐.
그 끝에는 전망대를 미술작품으로 덧대 고친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 걸어온 가로수길을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바라본다.
높이가 바뀌니 느낌도 달라진다.
그리고, 이 가로수길 다음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본다.
호수다. 역시 좌우대칭.
인공호수 가장자리는 무조건 모양낸 돌로 경계를 유난스럽게 두르는
우리나라와 달리 완만한 경사로 자연스럽게 잔디밭과 물이 이어진다.
이 공원의 특징이자 재미는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가지 조경 방식이 합쳐진 점이었다.
앞서 말했듯 바로크는 자연을 재단하듯 디자인한다. 이 공원도 분명 그렇다.
반면 전체 구성은 바로크적이지만 실제 조경 하나하나는 영국식 정원에 가깝다.
인공의 느낌을 최대한 덜어내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추구하는 조경이다.
이 거대한 공원이 처음 압도적인 듯하다가도 친숙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런 두 가지 조경방식의 조화에 있었다.
햇빛이 부족해 날만 좋으면 일광욕에 미치는 유럽답게 선베드가 이어진 것도 우리와 다른 점.
한가롭게 고니가 헤엄치는 호수를 따라, 벌써 돌아갈 시간.
여기까지 오는데에만 1시간이 걸린 것이다.
약속 시간까지 가려면 1시간뿐. 올 때는 가운데 가로수길로 왔으니
갈 때는 옆쪽 또다른 가로수길로 간다.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숲 사잇길을 지나간다.
쭉 뻗은 좌우대칭 로수길이 보기엔 멋지지만, 거닐기엔 역시 이런 길이.
얼마 뒤 묘한 길이 나온다.
순간 길이 갈라진다. 그러나 실은 저 길은 다시 만나는 길.
그럼에도 두 방향 중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게 된다.
왼쪽? 오른쪽? 아니, 그래도 왼쪽?
어차피 만나게 되어있는 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가 우습다.
왠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길인듯했다.
저 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드디어 다시 직선 길로 접어든다.
이번엔 가로수길만이 아니라 옆으로 물길이 있다.
그리고 물길 양 옆으로 다시 가로수길이다.
왜 양 옆으로 나무가 줄지어선 이런 길은 이렇게 매력적인가?
자연을 인간의 의지대로 만든 공간임에도
자연의 힘을 더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 때문일까?
정말 원없이 가로수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앞서 걸어온 중간 길과는 또 다른 분위기. 그저 즐거웠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돌아 오는 데에만 또 한 시간이 흘렀다.
빠르게 왕복하는 데에만 두 시간. 중간에 있는 미술 작품들을
다 찾아보았다면 대여섯 시간도 모자랐을 것이다.
다 못 본 것이 아쉽지만 늦게 온 것이 후회스러울 뿐.
그 사이 하늘은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성에서 잔디밭을 바라보니 가운뎃 길은 조형물 때문에 가렸지만,
양쪽 물길 가로수길은 한 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눈이란 착각을 잘해
완만하게 벌어지는 각도지만 여기서 보면 나란히 난 길처럼 보인다.
공원을 나와 시내로 돌아가는 길, 바로 옆에 또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궁전 앞 넓은 잔디밭을 본 탓에 이 정도 잔디밭은 소박해 보인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그런데 가운데 쪽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커다란 바위가 고목 위에 걸려 있다.
이번 도쿠멘타 출품작 중 대중적으로 인기 좋은 작품이다.
카셀의 첫 인상은 참 수수했다. 아니, 볼품이 없었다.
다른 독일 도시라면 고풍스런 옛 건물들이 즐비하고,
광장 앞에는 검은 고딕 성당이 우뚝 서고,
그 사이로 난 좁은 골목들이 펼쳐지지만 카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2차대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들이 폭격을 받아 파괴되어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아 그 역사를 느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가로수길을 보고 나니 카셀이 사랑스러워졌다.
아마 이 길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저 공원을 보면서 든 생각은 천편일률적인 조경으로 꾸미는 우리 공원들이었다.
한국의 공원은 다양하게 치장은 하지만 거닐기는 결코 좋지 않다.
잔디밭은 울타리로 막혀 있기 일쑤고, 아기자기 꾸민다고 꾸몄지만
난삽한 것들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다.
카셀의 카를자우에 공원은 크고 넓을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그저 푸른 풀밭과 잘 자란 나무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공간은 매력적이었다.
우리 공원도 그냥 자연스럽게, 꾸민 티를 내지 않으면서 나무와 풀만
즐겁게 즐기도록 꾸밀 수는 없을까?
보기에 좋은 공원이 아니라 거닐기 좋은 공원이 진정 좋은 공원이란 걸,
거닐기 좋은 공간은 보기에도 좋다는 것을 카셀에서 느끼면서
우리 동네 공원들이 떠올라 아쉬움 속에 돌아와야 했다.
진정한 공원이란, 놀이 공간이자 휴식 공간이란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는 연인들이 도망가는 애인을 붙잡고 넘어져도 되는 곳,
넘어진 연인들이 저절로 부둥켜 안고 뒹굴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그런 모습을 대한민국 공원에서도 보고 싶다. 어서 그런 공원들이 생겨주기를.
by 구본준 http://blog.hani.co.kr/bonb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