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단독주택들이 남아있는 서울의 한 골목,
경사진 언덕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이 집이 나옵니다.
▲ 김두호 사진가
한 눈에도 일반 집들과는
좀 달라 보입니다. 가정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집 전체는 물론
옹벽까지 모두 검은 전벽돌입니다. 그래서 장중하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합니다.
이 집의 입구는 왼쪽 옆구리에
있습니다.
옆도 마찬가지. 한가지
재료로만 처리한 벽에 요철을 두어 리듬감이 생겨났습니다.
입구는 아주 작고
좁습니다.
내부는 바로 확 트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동굴같은 공간이 먼저 나옵니다.
마주보는 벽에는 이런 영상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영상 가까이 가면 동작을 감지해 갑자기 나비떼
영상이 나타납니다.
도대체 여기는 뭐하는 집일까요?
안으로 들어갈 차례지만, 코스는 갑자기 옆으로 난 철제 쪽문으로 빠져야
합니다.
꼭 그리 해야만 됩니다. 이 집은 그렇게 보도록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쪽문을 열면 뜻밖의 벽화가
나타납니다. 검은 실루엣의 소녀. 그 소녀 안에는 꽃나무가 피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철조망에 갇힌 처지입니다.
건물 바깥, 뒷집과의 사이, 뒷집의 축대와 이 집
사이에 난 길고 좁고 어둡고 음침한 좁은 공간이 우리가 가볼 곳입니다.
바닥에는 깬돌, 쇄석이 깔렸습니다. 저 멀리 빛이
보입니다. 마당쪽입니다.
그런데 벽의 소녀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와 마주보는 벽에는...
실제 사람 얼굴 그대로 본뜬 벽조각, 부조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각사각 거리는 쇄석을 밟으며 그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누구
같으십니까?
나이든 얼굴들입니다. 할머니들입니다.
이 할머니들은 특별한 할머니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슬픈 할머니들입니다. 바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입니다.
맞습니다. 이 곳은 저 할머니들을 위한 특별한 집입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한국의 꽃다운 소녀들을 전장으로 끌고가 위안부로 만들었습니다.
이 집은 이제 고령이 되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입니다.
이 특별하고 슬픈 집이 올해 어린이날 문을 열었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가장 처절한 희생양이었던 할머니들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전쟁 대신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날을 개관일로 골랐던 것입니다.
이 집을 설계한 건축가는 이 두 분입니다. 와이즈건축이란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부부 건축가, 장영철 전숙희
소장입니다.
남편 장영철 소장은 40대 초반, 부인 전숙희
소장은 30대 중반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야 탄력을 받는 건축가로선 젊은 건축가들입니다.
문화관광부가 주는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주목받는 작가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 박물관을 좀 특별하게 설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은 입구, 1층, 2층의 순서대로 구경합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입구에서 옆으로 빠져 잠시 야외로 나갔다 와야 합니다. 그게 먼저 보신 어둡고 좁은
공간입니다.
저 공간은
할머니들의 슬픈 운명을 상징합니다.
할머니들은 10대 시절,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트럭을 타고 떠났습니다. 가
난한 부모와 딸들은 공장에 가서 돈을 벌게
될 것으로 믿었건만, 트럭은 갑자기 소녀들을 전쟁터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곤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저 좁은 통로 공간은 할머니들이 예상 못한 운명으로 빨려가듯 중간에 있는 지하실로 동선이
이어집니다.
특유의 축축함과 냄새가 조금은 느껴지는 어두운
지하실은 사람이 들어서면 자동으로 영상이 작동됩니다.
할머니들의 슬픈 증언이 낮게 공간에 깔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이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머물러야 했던 어둠의 공간을 상징합니다.
거적떼기만 바닥에 깔린 더 좁고 낮은 방안에서도
역사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 영상이 펼쳐집니다.
박물관은 이 좁은 길과 지하실을 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방문객들에게 본론을 이야기합니다.
어두운 공간을 경험한 뒤 만나는 밝고 개방적인 공간이 더욱 반갑습니다만,
결코 반가워해서는 안될 내용들이 이 안에도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니까요.
이 내부 공간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바로
계단입니다.
계단은 그 자체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웅변하는 하나의 조형 예술 작품입니다.
이 집은 새로 지은 집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있던
오래된 단독주택을 고치고 증축한 것입니다.
원래 단독주택은
이랬습니다.
왼쪽 저 집이 오른쪽처럼 바뀐 것입니다.
건축가는 원래 집의 구조를 노출시켰습니다.
세월의 흔적과 구조를 드러내 그 자체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두 시간대의 중첩과 연속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표면을 걷어낸 계단 벽은 벽돌 구조가 패턴을 이룹니다.
가만 보면 중간 벽돌이 좀 다릅니다.
창문이 있던 자리를 원래 벽돌과 비슷하게 막아 넣은
자리입니다.
낡은 벽돌처럼 일부러 정으로 흔적을 냈습니다. 그 정성이 절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벽돌 벽에는 글씨를 새긴 다른 색깔 벽돌들이 중간중간 박혀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분노와 회한, 그럼에도 포기 하지 않은 희망을 담은 메시지들을 새긴 것입니다.
어느 하나 가슴을 치지 않는 말이 없습니다.
읽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일본은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웃고 계신 모습에 더 가슴
아파집니다.
비록 그 내용은 슬프기 짝이 없지만 질감을 드러낸 계단 벽에 빛이 드리워
만들어내는 분위기만큼은 근사합니다.
계단에는 중간중간 기존 계단을 뜯어낸 자리나,
배관을 걷어낸 흔적이
할머니들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게 남은 상처처럼 나 있습니다.
2층이 본격적인 전시공간입니다. 주로 패널 위주의
설명형 자료들입니다.
이 자료들보다 건물 자체가 건축으로 할머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절로 숙연해집니다.
1층과 2층 사이
빛우물처럼 천장을 뚫었습니다.
그 벽에는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8000여명의 이름 3만여 글자가 빼곡합니다.
이 전쟁과 여성인권기념관은 할머니들의 오랜 절규의 산물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2년 1월8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역사적인 집회가 열렸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사과와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집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일본 대사관과 정부는
꿈쩍도 안했습니다.
집회에는 자연스럽게 수요시위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흘렀습니다.
수요집회는 기네스북에 오릅니다. 2002년 `한 주제로 가장
오래 열린 집회'로 기록된 것입니다.
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할머니들을 도와온 이들은 이 박물관을 짓자고 뜻을 모읍니다.
2003년 이야기가 시작됐고, 이듬해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꾸려집니다.
그러나 그건 무척이나 힘든 시작이었습니다.
위원회가 정부에서 지원받은 돈은 5억원. 적지 않을
수 있겠지만 박물관을 짓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기업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안하다는 거절만 이어졌습니다.
"회사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이 나섰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돈을
모으기를 10년이 계속됐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의 양심적인 이들도 많았습니다.
뻔뻔한 일본 정부를 대신해 일본 시민 3000명이 이 뜻깊은 건물 짓기에 동참했고,
무려 7억원을 모아 보내주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지원한
금액보다도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20억원을 모았습니다.
좋은 소식도
정해졌습니다. 박물관 부지가 마련된 것입니다. 서울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공원.
이
만한 장소도 없을 듯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이없게도 그러나 말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부 단체들이 이 박물관이 독립공원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겉으로는 장소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표현은 “애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을
들먹이고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할머니들을 ‘더러운 존재’로 취급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 할머니들은 분노했고,
가슴 속 상처는 더욱 커졌습니다.
황당한 거부 행태에 시민들이 분노해 사회적 관심이 잠시 끓어올랐지만,
결국 할머니들을 위한 기념관은 장소를 옮겨 성미산 부근 성산동으로 지어지기로 결정됐습니다.
이미 설계까지 다 마친 상태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지어지게 된 곳이 바로 지금의 이곳 마포 성산동 건물입니다.
이 박물관은 처음부터 기쁨 대신 슬픔과 함께 시작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 다시 박물관 구경을 하겠습니다.
일반인용 공간은 아니지만 박물관인만큼 수장고를 돌아봤습니다. 건물이 작아 수장고도 작습니다.
자료실엔
이 슬픈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연구하고 고발해온 책들이 주로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한국 자료보다 일본 자료가 더 많습니다.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위에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다룬 기사 스크랩북들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 문제를 오랫동안 보도해온 <한겨레> 스크랩들입니다.
민족의
문제를 어떤 신문이 진정 열과 성을 다해 주목하는지 보여줍니다.
마케팅용으로 스스로를 `민족지'로 포장하는 친일족벌신문들의 기사는 실제론 무척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갈 차례입니다.
앞서 보셨듯 이 박물관은 이 검은 벽돌 벽이 그 자체로 할머니들을 기리는
기념비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특히 저 전면 벽은 진짜 건물 벽이 아니라 덧댄 `스크린 벽'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간이 생깁니다.
건물과 벽 사이에 통로가 만들어지고, 통로를 가린 외벽은 가운데 낸
구멍들 사이로 빛이 들어옵니다.
그 벽돌 하나하나에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얼굴이 붙어 있습니다.
그 사이 구멍으로 사람들은 헌화를 할 수 있습니다. 건축 자체가 제단이자
비석이자 벽이 됩니다.
벽 뒤의 진짜 벽 창문은 검게 막아 거울처럼 저 구멍뚫린 벽 이미지가 비쳐 묘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컷. 저와 전숙희 소장입니다.
이제 내부 구경은 어느 정도 끝났습니다. 그러나 박물관 구경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다시 1층으로 갑니다.
희망을 상징하는 밝은 빛이 넘치는 마당이 마지막 코스입니다.
마침 찾아간 날은 외국인 관람객들이 많았습니다.
미처 몰랐던 일본의 만행을 본
그들은 놀랍고도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마당은 야생화의 공간입니다. 여러 꽃들이 릴레이하듯 순서를 이어가며
핍니다.
이 야생화 마당은 건축가가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곳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박물관을 설계하면서 외국의 전쟁이나 추모 관련 시설들을 살펴봤어요.
기념과 기억, 추모의 공간은 많았는데 `치유'의 코너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치유의 공간을 넣고자 했습니다." 건축가의
말입니다.
이 박물관은 정말 빠듯한 예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20억원 예산에서 이 집을 사는데 17억원 정도를 썼고, 나머지로 새롭게 고치고
더해지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건축가는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기념비성은 알맞게 살려냈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하듯 동선을 끌어가며
할머니들의 삶과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가히 스토리텔링의
건축입니다.
이런 리노베이션은 처음부터 새로 짓는 신축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일일이 기존 건물을 실측하고, 구조를 파악하고
하나하나 현장에서 꼼꼼히 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집은 30년도 넘는 집이었습니다. 대지는 100평 남짓한 350㎡에, 고치고 더해지어도
새 건물의 연면적은 308㎡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어둡고 좁은 축대 옆 공간,
그리고 냄새나는 지하실도 있었습니다. 건축가 부부는 서사구조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로
이런 요소들을 모두 박물관 속 이야기의 하나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저절로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집은 진정 `이야기로 지은 집'입니다.
이 집이 들어서야만 했던 할머니들의 슬픈 이야기가 있었고, 10년 돈을 모은 시민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후배에게 기회를 준 선배의 `아름다운 양보'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들의 박물관을 짓는 일을 도운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여성 건축가
김희옥(에이텍건축사사무소 대표) 소장이었습니다.
같은 여성으로써 할머니들의 아픔을 공감해왔던 김 소장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재능 기부로
새 박물관을 설계했습니다. 그 설계가 독립공원에 지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땅이 바뀌었으니 설계도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희옥 소장은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촉망 받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박물관을 설계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가에게 박물관 미술관 같은 공공건축물들은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가장 선호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사회적 의미도 크고, 건축적으로도 일반 건물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새로운 개념과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자신이 공들여 진행해온 작업을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건축계에선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김 소장이 후배 건축가들을 생각한 것은
능력을 갖췄어도 실적이 없고 연륜이 짧아 중요한 건물을 설계할 기회를 얻기 어려운
젊은 건축가들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김 소장은 후배들을 위한 기회를 주자고 결심했고,
건축계는 이 제안을 받아 젊은 건축가들을 위한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공모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는 ‘젊은 건축가상’수상자 중 2010년과 2011년 상을 받은 네 팀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저 장영철 전숙희 소장팀이 당선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건축가는 30~40대 신진 건축가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온 이들이고, 젊은 건축가상까지 받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사무실을 차린 지 오래 되지 않아 실제 이뤄진 건축 작업은 별로 없었습니다.
건물로 지어진 작품은 2개뿐인 이들이 선배가 양보해 생긴 공모전 덕분에 비로소 ‘일다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이 박물관은 처음 시도해보는 공공건축물이었습니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작습니다. 웅장하고 근엄한 상징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규모의 한계와 주택가란 입지 제약을 잘 극복해낸 건물입니다.
벽돌이란 소재로 튀지 않으면서도 기념비성과 상징성을 잘 표현했고,
디자인 못잖게 스토리텔링을 추구한 동선이 돋보입니다.
스크린벽을 덧댄 이중 외피 구조여서 내부와 외부가 교차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풍경과 표정이 만들어지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매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건물 옹벽을 건물과 같은 전벽돌로 처리해 건물과 벽이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게 만든 점입니다.
건축가 부부는 기존 단독주택을 처음 본 순간 ‘이건 벽돌이다’라고 동시에 느꼈다고 합니다.
검은 전벽돌은 특히
기념비성을 강조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고, 벽돌이란 재료 자체의 특성도 중요했다고 합니다.
"벽돌은 하나하나 쌓여서 큰 덩어리가 되잖아요. 이 박물관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2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았으니까. 벽돌을 쌓는 시공방식이
이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을 상징하리라는 느낌이 처음부터 들었어요."
건물은 작지만 외벽에 붙인 벽돌의 숫자는 5만장이 넘습니다.
벽돌로 건물을 덮으면서 건축가가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옹벽까지 벽돌로 처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도 건물이 조금이라도 더 커보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설계를 하게 되고 나서 수요시외 현장에 나갔어요. 그런데 꿈에 그리던 박물관을 짓게 되었는데도
할머니들은 마치 이 꿈이 좌절된 것처럼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원래 짓기로 했던 독립공원 건물이 아니니까,
건물이 작으니까요. 그래서 작은 박물관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옹벽이 중요해진 거죠. 건물만 보면 작지만 3미터 높이 옹벽을 같은 디자인으로 하면 훨씬 커 보일
테니까요."
박물관은 완공됐지만 여전히 할머니들의 한은 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요시위는 그 사이 20년을 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결코 포기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 터인 독립공원 부지에 박물관을 짓는 꿈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답니다.
건축은 여러가지를 담습니다. 때론 분노를 일깨우는 건물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치유를 시도하는 건물도 필요하죠.
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분노와 치유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하게 하는
건물입니다.
문득 새로운 건물, 뜻깊은 건물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조용한 주택가 속에 자리잡은
저 박물관을 한번 가보시면
어떨까요. 우리가 어두움을 외면할 때 어두운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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