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7일 토요일
<Happy choir>제2회 정기 연주회를 참관한 수필가 원지헌의 수필
당신의 계절은 어디쯤 인가요.
원지헌
바람 찬 겨울날 오후. 모처럼 합창 공연에 초대 받아 갑니다. 잘 차려진 밥상에
빈손으로 숟가락 들러 가는듯한 기분. 어쩌면 좋을까요. 공연장 내부의 웅성거림이 잠시 멋는가
싶더니 드다어 커튼이 올라갑니다. 무대 위에 103명 혼성 합창단원이 빽빽이 정렬해 있습니다.
그들의 년령대는 어떻게 될까요? 추정키로는 흑백의 조화를 맞춘 세련된 드레스 스타일이 20대로
보이기도 하지만 완숙미로 치자면 4.50대 인가 싶기도 한데요. 여하튼.
당신은 벌써 합창 솜씨가 궁금한가 보네요. 서두르지 마세요. 그보다 먼저 무대 후면 상층부에 설치한
대형 비디오 화면을 보실까요? 노래하며 율동하는 단원 개개인의 모습이 가감 없이 크로즈업 되며
이어 집니다. 오오. 연령대가 조금 있으신거 같아요. 오늘의 공연이 있기까지
몸과 마음으로 얼마나 수고로운 시간을 견디어 냈을런지 조금은 짐작이 가는군요.
이견의 조화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장르가 합창일터이니 말이에요.
원 스테이지 세번째. 익숙한 대중가요가 흐릅니다. 사랑한다 한 마디만 해 준다면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거라고 노래 합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할 사람 그대 뿐이라는 ....
노래의 마지막 배경으로 도입된 죽음의 그림자마저 나긋나긋한 정감을 불러 옵니다.
내안의 가벼운 소요(소요)를 느낍니다. 거대 합창단의 노래가 은하수 처럼 흘러 갑니다.
훈훈하게 떠도는 정감의 입자가 스멀스멀 가슴을 데웁니다.
남녀교환 창 형식으로 부른 총각타령은 압권입니다. 궁금하시다면 가사를 훑어볼까요.
--머리머리 밭머리, 동부따는 저 큰애기, 머리끝에 드린 댕기, 공단인가 대단인가, 공단이건 나 좀 주게, 뭘 하려고 달라는가,
망건탕건 꿰어쓰고 자내집에 장가 갈세, 장갈랑은 오소만은 눈비 올 제 오지 말게, 우산 갓모 걸대 없내, 갓몰랑은 깔고 자고
우산일랑 덮고 자세, 잠잘 적에 꾸는 꿈은 무릉도화 부럽잖고, 같이잡고 거닐적에 비바람도 거침없이 풍파속에 사는세상,
임 놔두고 어이 살까, 장가들러 어서 오소 장가들러 어서 오소-
복잡다난한 가사에 숨 가쁘게 빠른 곡을 악보 없이 소화해 냅니다. 가난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산반되는
맛깔스런 해학이 맞물리며 세대를 통합하는 합창의 합창의 별미를 선사 합니다.
당신은 얼른 어머니 손맛의 들기름 김치볶은밥을 떠올려 보세요.
겨울 밤마다 생각나는 침이 꼴깍 넘어가는 오래된 깊은 맛이 그립지 않으세요.
나이를 감추려 하지 않고, 젊음을 흉내 내려 하지 않는
시니어 합창단이 버무려 내놓는 고전의 별미에 속절없이 빠져 듭니다.
다시 열리는 스테이지. 단원들이 빨강 노랑 파랑의 티셔츠 차림으로 발랄하게 등장합니다.
사실인즉 평균연령 여든살의 어르신들입니다.
당신은, 가을 깊은 날의 천불동 계곡이거나 피아골 한자락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어요.
순간, 경쾌한 캐럴에 공연장이 들석거립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군요.
백여명 단원들이 동시에 팔을 뻗어 실버 벨을 울리자 여기저기서 함박 웃음이 불꽃처럼 터집니다.
천진한 슬로우 모션이 뜻밖에도 최고조의 정겨움으로 다가 옵니다.
그것은 대중성 얘술성의 규정된 잣대를 넘어서는 몸짓입니다. 극과 극은 일맥상통한다 했던가요.
희비애락의 고산준령을 넘고 넘어 마침내 유아적 전진성에 당도한 인간 내면의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한그루 또 한그루. 한 생애의 무게를 감당하며 꿋꿋하게 살이낸 나무들을 봅니다. 삶에 겨워 뜨겁게 타오르는
농익은 가을 숲을 봅니다. 울긋불긋한 가지 사이로 겸허한 자부심이 소박하게 들어납니다.
인간사 초월한 연륜의 고상함이 교만을 모르는 황혼의 아름다움이 물들어 번집니다.
내 마음이 숲에서 뛰어놀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무구함에 손수건은 절로 눈자위를 누르고 있습니다.
우매한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혹여 해돋이와 해넘이의 아름다움을 견주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봄과 가을이라면 심리적 무게 중심은 어느쪽으로 기울고 있습니까? 취향이 아닌 자연현상을 보는 당신만의
객관적 관심이 궁금합니다. 꽃과 단풍은 또 어떤가요? 우리 같이 한번 생각해 보시자구요.
존재하는 순간부터 끝까지 오고 또 가는 시간의 의미, 노년의 삶에 대해 말이에요.
시니어 합창단의 출현이 충격이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웃으시겠습니까? 툭하면 "이 나이에 어떻게" 라는
관용구를 앞세우며 스스로 제 발길을 가로 막아온 저에게 충격 이상의 '경종'으로 들린다면요?
열다섯 곡 합창, 예상외의 감동이었습니다. 밤하늘 어딘가를 맴돌며 흐르는듯한 몽환적
하모니에 허투루 볼 수 없는 유종의 미가 별처럼 반짝였습니다. 떠오르는 태양보다 뜨거운
석양의 열정이 순수하고도 고마웠습니다. 시작보다 중요한 마무리를 보았습니다.
찬란한 노래의 숲, 세월을 잊은 백여 그루의 노거수가 부른 노래는 가슴을 흔들어 깨우는
진정한 "인생찬가"였습니다.
해돋이부터 해넘이까지 우리 몫의 인생입니다. 당신이라면 동해의 일출과 서해의 일몰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간절곳의 여명과 순천만의 낙조, 그 깨트릴 수 없는 두 컷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맞견줄 수 있나요.
아침과 저녁이 한 날의 시간입니다. 춘하추동 사계절도 청년도 노년도 비교불가 대상인 동급의 고유한 우주적 현상이며 자연물입니다. 어떠한 시공간 어떠한 환경에도 마음의 행복은 있습니다. 노년은 허물어지는 시대가 아닙니다.
머지않은 날 스러질 운명이기에 더욱 가차있는 황혼입니다.
우리 생에 주어진 시간이라는 자동차에 후진 기어는 없습니다. 오로지 한 길, 직진뿐일진대
여력을 다해 옹골차게 재미있게 살아야만 하는 금덩이 같은 세월 아닌가요. 부리나케 쫓아온 겨울이
신들린 듯 내달립니다. 한 생의 거대한 수레가 종착역을 향해 속도를 좀 더 높였는지도 모릅니다.
겨울밤, 고요의 한가운데서 세상 모든 저무는 존재에 사무치는 애정을 보냅니다.
화장장의 연기와, 십이월과, 땅위를 뒹구는 낙엽에도.
못난 글과 눈 맞춤하는 지금, 당신의 계절은 어디쯤인가요.
(부경 아카데미 회원인<경헌 해피 콰이어> 단장 이정식 단장님과 단원들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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