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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20세기 ⑤대약진과 대기근⑥ 문화대혁명

왕자별 2007. 8. 3. 12:39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20세기 ⑤대약진과 대기근⑥ 문화대혁명
하니Only
오래된 빈곤, 기근에 찌든 농촌에서 흘러온 절박한 난민들의 미래는 굶주림이나 추위로 거리에서 죽는 것이다. 북폴리오 제공
공포에 휩싸인 거리, 1937년 8월 전쟁이 상하이까지 덮쳤다. 일본군은 황푸 강 연안과 부두를 점령하고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짐을 짊어진 중국인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프랑스 조계지 관문에서 밀고 나가려 버둥대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의 시선, 조지 크라이누코프는 전쟁 특유의 장면들을 포착 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중국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북폴리오 제공
형제 돌보기, 아이가 네다섯살쯤 되면 일하러 나갈 엄마를 대신해 다른 형제자매를 돌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명릉 저수지, 1958년 5월부터 8월 사이에 건설한 이 저수지는 대약진운동이 선도한 최초의 집단노동운동였다. 5월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현장을 측근들과 함께 버스 여섯대에 나누어 타고 몸소 방문하여 30분 동안 흙을 팠다. 땀이 나기 시작하자 차를 마실 겸 멈춘 뒤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주치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를 위해 일한 22년 동안 마오쩌둥이 중노동을 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런데도 마오쩌둥은 고위급 당 지도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관리라면 여기 있는 우리를 포함하여 누구든 힘 닿는데 까지 육체노동에 참여해아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과 주변 농촌 주민들은 불볕더위와 억수 같은 빗속에서 커다란 바위와 엄청난 양의 모래를 다른 아무런 장비도 없이 운반용 장대와 삽, 바구니만으로 옮겨야 했다. 북폴리오 제공
힘든 노동, 모녀가 남서쪽에 있는 리 강에서 상류 쪽으로 배를 끌고 있다. 1950년대에도 여전히 인간의 힘이 주요 동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약진운동은 누적된 인력이 기계화의 결핍을 메워줄 거라고 믿으면서 일련의 대규모 운동에 수십만 명을 동원했다. 북폴리오 제공
인간사슬, 대약진운동에 따른 집단노동 동원의 첫 신호탄은 농촌 수로와 관개 운동이었다. 사진에서 보듯 장시성에서도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지역 농민들이 14만 입방미터의 흙을 옮겼다. 1957년 12월 사업을 시작했으며, 1년이 지난 뒤에 마오쩌둥은 이 계획들로 인한 인명 손실에 놀라워했다. 마오쩌둥은 당 간부들에게 한 연설에서 “두말 할 것 없이 중국 인구의 절반이 죽게 될 것이다. 절반이 아니더라도 3분의 1이나 10퍼센트는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들은 일자리를 잃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내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폴리오 제공
역사 수정되다, 1958년 5월 마오쩌둥이 곁에 있는 혁명용사 펑전과 함께 명릉 저수지에서 땅을 파고 있다.(사진 위) 이 사진은 대중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헌신적인 애정의 증거로 널리 배포되었다. 당시에는 펑전이 당 서기였지만 1966년 숙청당한 뒤로 이 사진이 당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래 사진으로 수정했다.북폴리오 제공
성찬,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농촌을 강타한 가혹한 굶주림은 서양 뿐 아니라 중국 내부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의 외교관들은 1964년 노동절에 인민회관에 차려진 진수성찬과 같은 것들에 현혹되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북폴리오 제공

체면유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공개석상에서 웃는 얼굴을 잃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영웅적인 노동계급에 경의를 표하는 현수막 아래로 나무소총에 가짜 탄약 주머니를 매고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여학생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20세기 ⑥ 문화대혁명
하니Only
흑방의 단원. 1966년 9월12일 어린 홍위병이 중국 북쪽 끝에 있는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리의 목에 걸린 간판이 그를 ‘흑방의 단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흑방은 마오쩌둥이 새로이 선포한 문화대혁명을 방해하려 한다고 고발당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낡고 봉건적인 모든 요소들을 사회에서 쓸어버리기 위해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모인 10대 소녀들은 홍위병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고 공격적인 편이었다. 홍위병 경험에 대한 자전적인 회고록에서 류솔라는 열한 살 때 학교에서 홍위병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걸했는지 회상하고 있다. 엄청나게 지독한 말로 가족을 공개 비난하고, 한때 지주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늙은 넝마주이를 감시하는 일을 도운 뒤에야 가입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그 늙은 여인은 류솔라가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목을 베어 자살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러한 비극은 비일비재했다. 북폴리오 제공

타파와 비판, 강제 삭발 전후의 장면. 항일 전쟁 당시 홍군의 고위 간부였고 오랜 동안 헤이룽장성을 다스린 리판우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나라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홍위병 집회에 소환당했다. 곧 집회가 있을 거라는 제보를 받은 젊은 사진기자 리전성은 헤이룽장성의 당 신문에 게재하기 위해 사태를 기록하러 갔다. 시장 리판우는 국가의 반역자일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 처럼 머리를 넘기는 오만함을 보여준다고 홍위병이 고함치는 순간 리전성은 현장에 있었다. 즉석에서 머리카락을 잘리는 수모를 당한 뒤 리판우는 잘린 머리카락이 목 아래에 쌓인 상태에서 홍위병에게 절을 강요당했다. 마오쩌둥의 사진 위에는 지방 성 정부를 비판하고 타파하라고 홍위병에게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리판우는 실제로 공직과 당내 직위를 박탈당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결백을 주장했고 1967년 또다시 수모와 박해를 당했다. 북폴리오 제공
공자와 그 무리’, ‘낡은 봉건질서’의 요소와 ‘반동분자’ 색출이 1966년 널리 횡행했다. 홍위병이 산둥 성 취푸의 언덕에 2000년 넘게 후손들이 보존해 온 공자의 사당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 홍위병이 본전 입구의 정교하게 조각한 대리석 기둥을 커다란 해머로 부수고 있다. 왼쪽 위에는 인민에게 ‘공자와 그 일당을 공격하라’고 촉구하는 구호가 보인다. 이 구절은 1919년 5.4운동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중국과 티베트의 사당과 사찰이 여럿 파괴된 것은 심미적인 측면에서 문화대혁명이 낳은 비극 중 하나이다. 북폴리오 제공
진정한 신봉자, 문화대혁명이 심화됨에 따라 홍위병은 ‘반동분자’를 학대하고 자신들의 ‘혁명 경험’을 공유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인민해방군 소속인 이 병사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활기로 유명해졌다. 1968년 4월16일에 찍은 이 사진에서 그는 마오쩌둥의 어록이 담긴 빨간 소책자를 꼭 쥐고 자신의 혁명적 열의에 감동한 전국의 농민들이 준 마오쩌둥 단추와 배지를 자랑스럽게 가리키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마오쩌둥 숭배, 1966년 8월부터 그 다음 해까지 대규모 홍위병 집회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열렸고, 마오쩌둥은 자금성 정문 꼭대기에서 그들을 사열했다. 1967년 5월 같은 장소에서 한 홍위병 그룹이 다 함께 마오쩌둥 수첩 첫 장에 있는 그의 사진을 펼쳐 흔들어대고 있다. 한때 홍위병이었던 류솔라의 후일 기록에 따르면 “마오쩌둥 위원장이 천안문에서 손을 흔들자 100만명의 홍위병은 마치 호르몬 반응이라도 보이듯 목놓아 울었다. 훗날 마오쩌둥이 화면에 나타나기만 해도 모두 울음을 터뜨릴 준비가 이때 이미 되어 있었다. 그는 신적인 존재였고 세계혁명의 흐름은 그의 지휘에 따라 흥하거나 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폴리오 제공
얼간이 모자, 문화대혁명 당시 공인들은 종종 얼간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모욕을 당하면서 거리를 끌려다녔다. 이 같은 광경이 비일비재하자 얼간이 모자는 시선을 끌기 위해 점점 더 커졌다. 1966년 9월에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헤이룽장성 당서기 런중이가 쓴 엄청나게 큰 얼간이 모자가 한 예다. 북폴리오 제공
예술과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당시 예술과 마오쩌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전직 여배우였던 부인 장칭은 이 시기에 문화분야를 감독했고, 소수의 이른바 ‘혁명 가극’만이 극작품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작품은 인민해방군의 예술단원들이 공연했는데, 단장이었던 린뱌오는 관료 중 마오쩌둥 부부의 가장 헌신적인 지지자 중 한 명이였다. 1967년 광저우 중앙역에서 군 예술단이 3년 전 린뱌오가 처음으로 편집한 마오쩌둥 어록이 담긴 빨간 소책자를 읽으며 무용을 공연하고 있다. 한때 ‘몽고 바이올린’이라고 불리던 얼후(중국의 근대 현악기)와 작은 피리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전통악기는 혁명 정서를 올바르게 표현할 때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북폴리오 제공
당의 노선, 문화대혁명이 쇠퇴하는데도 정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초점을 바꾸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1974년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 안 모습으로, 승객들이 모여 객차에 걸린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며 끝까지 투쟁하자”고 촉구하는 현수막 아래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린뱌오는 1971년 비밀리에 숙청당했지만 그의 죽음(소련으로 도망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전해진다)은 1972년에야 발표되었다. 정부는 실각한 장군과 공자를 연계해 린뱌오의 반동 기질과 계급투쟁 반대를 강조하려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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