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공간

묘 비 명

왕자별 2013. 2. 24. 15:48

묘    비    명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압축한 묘비명

 

김수환 추기경 ...."나는 아쉬울 것 없노라" (시편의 한 구절)

 

박인환 (시인)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조병화 (시인)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어머님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중광스님 ....."에이 괜히 왔다 간다"

 

천상병 (시인)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나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이순신장군 ....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 (必死卽生)

 

사도세자 ......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아버지 영조의 심경을 그대로 피력한 비문이지 싶습니다)

 

처칠 ........"나는 창조주께 돌아갈 준비가 됐다.

               창조주께서 날 만나는 고역을 치를 준비가 됐는지는

               알 바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미국의 시인)...."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테레사 수녀님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루와 같다"

 

버나드쇼(영국의 극작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아르키메데스 ... "내 묘비는 원기둥에 구가 내접한 모양으로 세워 달라"

  

                 

 

 

노스트라다무스(예언가)... "후세 사람들이여, 나의 휴식을 방해하 지 마시오"

 

                 

 

모리아 센얀 (일본선승)...."내가 죽으면 술통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술통 
                                바닥이 샐지도 몰라"

 

미리 묘비명을 써 놓으신 분도 계십니다

 

평생 처녀로 산 어느우체국장.... 반송 (返送) - 개봉하지 않았음.

 

헤밍웨이 ......"일어나지 못 해서 미안하네"

 

-김광규- 

 

한 줄의 시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권력과 재산을 얻었으며 유명 문인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쓴 권력자의 묘비를
비아냥거린 이런 시도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다가는 그 흔적.
어쩌면 망자가 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메세지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라는 묘비명.
내가 본 묘비명 중에서 가장 위트가 넘치는 것은
버너드 쇼의 묘비명이다. 아시다시피, “어영부영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 라는 묘비명.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호요, 백 살 가까이 천수를
누린 이가 이런 말을 했다니, 나 같은 필부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경지다.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네”라는 헤밍웨이의 묘비명이나,
“에이, 괜히 왔다”는 중광 스님의 묘비명도 재미있지만,
멋스럽기로는 예이츠의 묘비명이 인상적이다.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이여, 지나가라.”

(시인은 이처럼 아름답고 멋스런 표현을 좋아하지만,
나는 산문투로 이렇게 풀이한다.
내 무덤에 넋놓지 말고 담담히 보게나.
자네 삶도 담담히 보고. 여그서 얼쩡거리지 말고
가서 자네 일이나 보시게나)
 

 

또, 자신의 시구에서 따온 듯한 릴케의 묘비명은
자못 비장미가 넘친다. --“오 장미, 순수한 모순이여!”

 

철학자 칸트의 묘비명도 음미할 만하다.

놀라운 직관과 예지로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
우주의 진면목에 다가갔던 당대 최고의 우주론자이자
대철학자인 칸트의 묘비명은 우주와 인간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을 늘 새로운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요,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묘비명을 압도하는 것을
우연찮은 기회에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퇴계 이황의 묘비명이다.

 

 

퇴계가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짓게 된 것은
제자나 지인이 쓸 경우, 꾸미고 과장되이 지어
남세스러움을 살까 저어한 때문이다.
묘비명은 대철학자답게 자신의 생애를 4언 24구,
96자로 압축한 것으로, 조그만 돌에다 새기게 했다.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

學求愈邈 爵辭愈嬰 進行之跲 退藏之貞

深慚國恩 亶畏聖言 有山嶷嶷 有水源源

婆娑初服 脫略衆訕 我懷伊阻 我佩誰玩

我思古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위 묘비명을 모두 풀이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된다.
따라 단락을 나누었다.

나면서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이 많았다.
중년에 학문을 좋아하게 되었고 느지막에 벼슬길에 들었네.

학문은 갈수록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자꾸 내려지네.

나아가기가 어려우매 물러나 은거하기로 뜻을 굳혔네.
나라의 은혜 생각하면 심히 부끄러우나 진실로 성현의 말씀이 두려웠네.

산 높디높고 물 쉼 없이 흐르는 곳.
벼슬을 벗어던지고 돌아오니 뭇 비방이 사라졌구나.


내 품은 생각 여기서 그친다면 누가 내 패옥을 즐겨하리오.
내가 고인을 생각하매, 고인이 먼저 내 마음을 얻었으니,

오는 세상에서 어찌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근심 속에 낙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었네.
조화를 좇아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대철학자 퇴계가 도달한 경지를 일개 필부가 헤아리기는
어려운 노릇이지만, 퇴계 묘비명의 마지막 구절은
두고두고 여운을 남기는 명문이라 하겠다.


조화를 좇아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안심입명의 경지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종결미를 보여주는
묘비명이 다시 있을까.

퇴계는 임종 직전 일어나 기대앉아 자리를 정리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평생을 두고 사랑하던 매화를 보며
"매화분에 물을 주라" 하고는 앉은 채 숨을 거두었다 한다.
저물녘이었고, 어둑신한 하늘에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1570년 12월 8일, 향년 70세.였다

 

 

이황은 묘비에 관직을 쓰지 말도록 유언을 내렸으므로
‘퇴도만은’ 이라고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