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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랜 선배

왕자별 2013. 7. 19. 12:28

오랜동안 함께 지내온 선배가 있다. 20대 후반쯤 만나 여지껏 함께 술먹고, 밥먹고, 놀러가고, 갈쿠고, 낄낄대며 살았다.

 

이 선배 첨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은 아버지 남방 빨아입고 촌에서 갓 올라온  나이먹은 대학원생이었다.

영락 농촌 총각 패션인데 뭔가는 당당했다.

당시에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자취해가며 살았다 한다.

그리고는 대학 입학 이후부터는 생활비를 포함하여 완전 독립군이 되었다 한다.

 

이 선배 사는 모습을 보자면 감탄을 넘어 기가 막히는 수준이다.

대학 다닐 때 셋방 하나 얻어 살림살이 장만한 경험을 예로 들면 이렇다.

운동삼아 아침에 동네 한바퀴 조깅하면서 돈다.

운 좋은 날이면 부잣집 문앞에는 아직 쓸만한 가구며, 고쳐 쓸만한 가전 제품이 나와 있다.

가구는 동네 집수리하는 집 리어카 빌려다 실어오고 가전은 걷어다가 대강 고쳐서 쓴다.

동네 가겟집 아저씨와는 금방 호형호제하며 지내고,

김치 떨어지면 시장 아줌마한테서 얻어다 먹고,

미장원에 이발하러 가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 떨다 과외 알바 건져 오고,

독서실에 공부하러 갔다가 총무자리 꿰차 오고,

이런 식이다.

집에 가보면 큰 집에 세간살이라고 별 게 없는데, 그렇다고 아쉬운 것도 없다. 필요하면 한바퀴 돌아서 구해오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돈도 별로 없었는데 선배랍시고 늘 얻어먹었다. 

사는 게 럭셔리하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옹색해 보인 적도 없었으니까.

맨날 얻어먹어서 잘 모르지만 돈에 관한 한 이 선배 특징이 있다.

우선 술 먹는 데 외에는 돈을 거의 안쓴다. 무지 구두쇠다.

시계는 늘 판촉물이고, 운동화는 3만원짜리 리어카표다.

돈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은 사는 게 서툰 놈들이나 하는 거,

돈 없이도 발상만 바꾸면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주의다.

못이 필요하면 공사장에 가서 구해오고,

돌맹이가 필요하면 근처 개천가에 가서 집어온다.(사실 이런 행위 위법이다)

 

작년에 고양동에 전원주택식의 너와집을 지었다.

지인들이 주말, 주중 가리지 않고 뻔질나게 찾아간다.

형수가 대단한 체력과 심력 안팎으로 보통 내공이 아니면 불가능한 생활이다.

물론 나도 가끔,, 쪼금 자주 보탠다. ~.~b

200평 넘는 텃밭에 이것저것 기른다.

공식 직업은 교수, 본업 같은 부업은 농사다. 내년에는 닭, 토끼 등 축산도 한다고 한다.

독립군 출신답게 자급자족을 꿈꾼다. 출신이 워낙 게릴라이긴 하다.

우리 식구들이 가면 얻어 먹고만 오는 게 아니라

비지땀 흘려 키운 작물들 보따리로 싸가지고 온다.

양심은 있는지 그런 날 귀가하는 뒤통수가 좀 땡기긴 한다.

 

이 선배,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형수도 모른다.

원래 닭띠인데, 습성은 쥐를 닮아서 아마 여기저기 구석구석 쟁여놓았을거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사람들 오면 뒷마당 항아리에 묻어논 돈 한줌씩 꺼내 먹을 거, 마실 거 내와 대접한다.

 

언젠가 이 선배의 이런 넉넉함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에는 농촌의 산과 들에서 놀며 어른들의 도움없이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고,

혼자 도시 생활을 하면서는 자기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체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넉넉함은 가진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 사람이 사는 방식과 훨 관련이 많을 거 같다.

 

정말, 평생 행복하게, 건강하게, 기분좋게 사시길 빈다. 그래야 나도 죽을 때 까지 얻어 먹고, 또 쫌은 갚을 기회가 있을 게 아닌가.

출처 : Gost
글쓴이 : 데데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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