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九 생몰년도: 1876년(고종 13)-1949년 자: 연상(蓮上)
1949년 6월 26일,김구는 숙소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중국시선》을 읽고 있었다. 11시가 조금 지나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만나기를 청했다.잠시 뒤 비서가 안두희를 김구의 방에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2~3분이나 되었을까 2층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총소리에 놀라 비서와 경비원 등이 올라갔지만,김구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손으로 자행된 김구 암살은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되고 조직적으로 전개된 정권차원의 범죄였다.1995년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국회에 보고한 암살의 배후는 총 참모장 ? 헌병부사령관 ? 재판장 ? 국방장관을 지나 이승만과 미국에까지 관련성을 묻고 있다.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와 암살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가 아닌 동족의 총탄에 쓰러진 민족의 거목,김구. 한국 근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김구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기는 하나 조선‘효종 때 김자점의 역모죄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게 되면서 양반 신분을 잃은 상민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학식은 없었지만 선조에 대한자부심이 대단했고,한 해에도 몇 번씩 인근양반들을 때린 죄로 해주감영에 갇혔을 만큼의기(意氣)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창암(소년기 김구의 이름)은 아버지의 의기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아버지처럼 양반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반이 되어 부친의 한을 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통감》. 《사략》. 《{대학》 등의 고전과 시문을 익혀 아버지의 이름으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사급제는 미리 정해놓고 과거는 나중”에 볼 정도로 부패 했던 한말의 과거는 그의 꿈을 외면했다. 과거에 낙방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과 풍수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지만,그 무렵 거세게 불고 있던 동학의 물결이 창암의 뜨거운 피를 들끓게 했다. ‘동학에는 빈부귀천에 차별대우가 없다’ 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아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가 되고 이름도 김창수로 바꾸었다. 새 삶을 연다는 뜻일 것이다. ‘애기접주’ 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선봉장으로 농민운동에 참가했다가 때늦은 홍역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패배하고 말았지만,동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은 자주적인 애국정신과 항일 민족주의를 그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이 무렵 자신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안태훈을 만나는데,그가 바로 안중근의 아버지이다. 김구가 안태훈에게 잠시 몸을 의탁할 당시 열세 살이던 안중근의 모습이 《백범일지》에 기억되어 있기도 하다. 동학농민운동에서 패전한 뒤에는 은신하며 성리학자 고능선으로부터 위정척사(衛正斥邪) 노선을 전수받았고,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만주에 건너가 의병전쟁에 참여했다. 의병 활동도 여의치 않자 귀국하던 길에 대동강변 치하포에서 일본 정보장교 스치다를 처단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타살하였노라”는 포고문을 붙인 뒤 집으로 돌아와 일본 순사가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부모님들이 피신을 권유했지만,‘사감(私感)의 소치가 아니고 나라의 큰 부끄러움을 씻기 위한 것인 만큼, 구차하게 피신 할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그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면서 《태서신사》《세계지리》《세계역사》등의 서양저술을 접했다. 이들 책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김구의 사상은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간다. 서구적인 정치사상을 갖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1898년 탈옥한 뒤,폼을 감추기 위해 공주 마곡사에서 불교에 입문해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이름을 구(龜)라 고쳤다. 애초부터 불교에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뜻은 없었던 듯하나 불교의 기본 교리를 전수받고,또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동학과 유교,불교를 거친 그의 종교적 종착점은 기독교였다. 기독교 신자가 된 계기는 분명치 않다 당시 기독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1903년 기독교에 입문해 그 뒤 기독교 교육운동에 매진하면서 학교 설립 추진과 구국강연운동을 펼쳤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상동교회의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문 앞에서 조약의 철회를 상소하며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했고,1910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해 국내 무력항쟁 및 만주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분담금 모금을 추진했다. 이 무렵 일제는 애국지사들을 모조리 체포하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김구도 이른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체포,17년 형을 선고 받았다. 김구는 옥중에서 일제의 국적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이름을 김구(金九)로 바꾸고,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백정의 ‘백(白)’ 과 범부의 ‘범(凡)’ 을 따서 ‘백범’ 이라는 호를 붙였다. 1914년 인천 감옥에서 가석방된 김구는 가족에게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며 그의 삶에 얼마 안 되는 평안함을 누린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나도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신세 때문에 새로운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1919년 3월 3일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의 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마침 상하이에 도착한 날은 3,1운동의 결과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포 일이었다. 김구는 애국계몽운동 시절의 선배이며 임시의정원 의장인 이동녕을 찾아갔다. 당시 초기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안창호에게 임정의 문지기가 될 것을 청했다가 안창호가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경무국장에 임명한 뒤 임정이 안팎으로 존립의 위협을 받던 1923년 내무총장에 선임되었고,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면직과 2대 대통령 박은식의 사임 등으로 임시정부가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이동녕의 천거로 국무령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군사력에 맞서 최소의 역량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은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장제스를 만나 한중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 동안 여러 갈래로 갈라진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해 임시정부를 강화하고,항일 결전 태세를 갖추어 숙원사업인 광복군을 창설했다.임시정부의 주석에 오른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적은 수의 병력이나마 광복군을 연합군과 함께 조선 탈환에 투입해‘선물로 받은 독립’이 아니라 ‘쟁취한 독립’을 이루려 참전을 준비하던 중,일제의 패망과 조국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김구 이하 임시정부 요인은 그 해 11월 장제스 정부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중국 군용기 편으로 조국을 향해 이룩했지만,상하이에서 비행기를 옮겨 타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시되고,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해야 했다.국내의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해 환영객 하나 없는 환국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경교장은 곧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인사 행렬이 줄을 이었다. 김구는 귀국 후에도 임정을 중심으로 좌우연합체를 구성해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으나 좌우익의 분열과 미군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신탁통치 안이 전해지자 김구는 곧 국무회의를 소집해 반대 결의를 했다.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고,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미군정에 맞섰다. 찬탁으로 돌아선 좌파에 맞서 우파의 영수로 자리 잡으며 반탁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미군정의 지지를 확보하고,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던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 남북협상에 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결국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 되었고,이후 김구는 남북 정부 ‘양쪽의 냉대를 받다 1949년 6월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평 가 김구의 장례식 날 100만의 조문객이 모여 분노와 애통으로 오열했다. 그러나 이후 김구의 정치적 기반인 한독당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해체되고,김구의 노선은 불온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이 김구의 묘지를 찾는 것도 막았다. 1960년 4월 혁명 뒤 ‘백범 김구 선생시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진상 규명 활동에 나섰지만,5 16군사쿠데타로 무산되었다. 정부 수립 50돌인 1998년 8월 한 신문사가 국회의원과 학자들을 대상으로‘대한민국 50년,위대한 인물 10인’을 조사한 결과 두 집단 모두에서 김구가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혔으며,지금까지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리 청소년들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든다. 또한 “우리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첫손가락 꼽히는 인물이 김구이다. 비록 김구의 주도로 이루어진 남북통일운동이 실패했고,김구의 이상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기는 했지만,민족분열을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민족의 주체적 역량으로 극복하여 통일정부수립을 기도했던 김구의 노선이 갖는 의미는 아직까지도 축소되지 않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1969년 서울 남산에 김구 동상이 설립되었다. 1999년 50주기에 《백범김구전집) 12권이 발간되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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