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옛날. 대여섯 살쯤이나 되었을까 한 남자 어린이가 토끼섬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일하러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지요.
이 어린이에게는 부모나 형제가 모두 없었고 다만 환갑을 넘긴 할머니 한 분이 유일한 가족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물질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해녀였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물질하기도 힘에 겨웠지만 손자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오늘도 할머니는 변함없이 고기를 잡기 위해 아침 일찍 바다로 나갔습니다. 어린이는 할머니가 바다 속에서 갖가지 해물을 건져 올리는 동안 홀로 바닷가에서 모래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개를 주우며 할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오실 시간이 되면 토끼섬 가까이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늘 토끼섬 부근에서만 작업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어떤 때에는 물이 빠지는 썰물이 되면 토끼 섬으로 건너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츰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시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철 모르는 손주는 그만큼 할머니를 빨리 만날 수 있어 좋기만 했지요. 할머니는 오래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나야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섭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 혼자 남겨 놓을 손주를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내가 없어도 살 수 있겠니?" 할머니가 슬며시 손주의 얼굴을 보며 물으면, "할머니와 오래오래 함께 살 건데요, 뭐." 손자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한 만년이라도 산다 던?" "그럼요. 만년도 더 살 거예요."
그러나 할머니는 점점 몸이 쇠약해져서 어느날 밤 잠이 들고나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의 혼백은 문을 나서서 토끼섬까지 가서는 손주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에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혼백이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발에는 뿌리가 생기고 겨드랑이에서는 잎사귀가 돋아 났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안 가서 토끼섬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났는데 만년을 살아야 한다는 손자의 말 때문에 할머니는 꽃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혼백은 만년을 살아, 손주를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 꽃이 바로 '문주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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